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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 신하동(新下洞)
    신하동(新下洞) 게시글에 대한 등록 이미지
출처 《大田地名誌》(大田直轄市史編纂委員會, 1994)
작성일 2008-09-25
조회 12159
첨부 1111538143.89_신하동.jpg (9.7KB)
상세정보

〔위치〕법정동인 신하동은 동쪽으로 충북 옥천군과 시계를 이루며 서쪽에서 서북쪽으로는 대청호에 접해 있다. 그리고 남으로는 신상동, 북으로는 신촌동과 접해 있다.
〔유래〕새로 생긴 마을의 아래쪽에 위치했다고 해서 생긴 이름으로 새들의 아래쪽에 있다는 마을이기도 하다.
〔연혁〕백제시대에는 우술군에 속했으며 신라시대에는 비풍군에 속하였다. 고려초기에는 회덕현에 속했다가 현종 9년(1018) 이후에는 공주부에 속하였다. 조선시대 말기 고종 32년(1895)에는 회덕군(懷德郡) 동면의 지역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신평리(新坪里), 소하리(小下里), 장대리(場垈里), 신촌(新村), 묘동(妙洞)을 병합해서 신하리(新下里)로 이름을 붙여 대전(大田, 大德)군 동면에 편입되었다가 1935년 11월 1일 대전부 신설에 따라 대덕군에 편입되고 그 후 1989년 1월 1일 대전직할시 승격과 함께 대전직할시에 편입되었다. 현재 행정동은 세천동이다. 신하동 서북쪽은 대청호에 수몰되었다.


<지명> 


개구리봉〔산〕
〔위치〕비금 서남쪽에 있는 물 위에 뜬 작은 봉우리이다. 


골말〔마을〕
〔위치〕절골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구절골(여치동, 사동(寺洞))〔마을〕
〔위치〕태봉산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유래〕옛날 큰절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으로, 지나가던 중이 마을 사람들에게 이 곳에 절을 짓고 부처님을 정성으로 모시면 마을이 흥하게 되고 잘 살게 된다는 말을 하여 이곳 사람들이 이곳에 큰절을 만들어 그 중에게 부처님을 모시게 했다는 데서 생긴 이름이라 한다. 


놀이터〔놀이터〕
〔위치〕신절골 동쪽 길 건너에 있는 어린이 놀이터로 시소, 그네 등이 있다. 


도성원〔사찰〕
〔위치〕골안에 있는 사찰 이름이다. 


동산고개(동산티)〔고개〕
〔위치〕주원장터 옆 동상수몰지에서 비금으로 올라가던 고개, 사러리 동쪽 양지바른 곳에 있다.
〔유래〕고개와 마을을 통칭해서 부르는 말로 보통 동산티라 부르기도 한다. 


마당바위〔바위〕
〔위치〕방축골 위에 있는 바위이다. 


묘곡〔산〕
〔유래〕산봉우리가 묘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묫골(욧골, 묘동(妙洞))〔마을〕
〔위치〕작은 태봉 왼쪽에 있는 마을이다.
〔유래〕동네 뒤의 삼태산(三台山)이 묘하게 생겼다 하여 붙여진 마을 이름이다.
〔특이사항〕묫골이라 부르다가 욧골로 변하여 현재에는 묘동이라 부른다. 


방축골〔마을〕
〔위치〕구절골에서 골말쪽으로 가는 고개 넘어 동네이다. 


배골〔골〕
〔위치〕태봉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백골산(白骨山)〔산〕
〔위치〕신하동과 신상동의 경계에 있다.
〔유래〕백제와 신라가 싸웠을 때 사람이 많이 죽어 백골이 많이 묻혀 있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다. 


뱀날〔산〕
〔위치〕삼태봉 아래에 있는 기다란 산을 말한다.
〔유래〕산의 형세가 마치 뱀이 아래로 내려오는 모양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뱃나루〔나루〕
〔위치〕비금 서쪽에 있는 뱃나루이다.
봉계내(봉계천)〔내〕
〔위치〕백골산에서 나와 봉계로 흘러가는 냇물의 이름이다. 


분투골〔골〕
〔위치〕큰 태봉 아래 있는 골짜기이다. 


불두골〔골〕
〔위치〕묘골에서 비금으로 넘는 골짜기이다.
불무골고개〔골〕
〔위치〕비얌날 아래 골짜기이다. 


비금(飛禽)〔마을〕
〔위치〕바깥아감 북서쪽에 있는 마을로 사러리와 토끼봉들 쪽에 자리잡고 있는 마을이다.
〔유래〕새가 나는 형상을 닮았다고 해서 비금이라고 했다고 한다. 또는 전해오는 풍수설에 의하면 이곳이 비금탁조(飛禽啄鳥)의 터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특이사항〕이 마을은 10여 호의 집이 있다. 


비금애향탑〔탑〕
〔위치〕비금마을 입구 큰 도로변에 건립되어 있는 탑이다.
〔특이사항〕1992년 10월 4일 신하동 주민일동이 건립하였다. 내용은 비금마을의 유래와 대청댐 건립으로 인한 실향의 아픔을 담고 있으며 하단에 애향시도 적혀 있다. 그 내용과 애향시는 다음과 같다.
비 문
우리 마을은 조선조 초기에는 회덕현에 속했으며 1895년엔 회덕군 주안면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신하리라 불리웠다. 1935년 10월 1일 대덕군 동면으로 1989년 1월 1일 대전시 동구에 편입되었다. 마을 주위를 형성하고 있는 지형이 새가 날으는 형상을 닮았다고 하여 비금이라 칭하며, 봉우리 셋이 수려한 모습으로 삼태성처럼 우뚝 솟아 삼태봉이라 부르고 왕의 태를 묻었다 하여 태봉산이라 명명한다. 10여 호 남짓 오순도순 살아 온 인정들이 1980년 11월 30일 대청댐의 완공으로 향리를 뒤로 한 채 이산의 슬픔을 맛보아야 했다.
(신하동 주민 일동 1992년 10월 4일)
향 시
동리에 남은 소박한 의지를
다소곳한 인정들과
떠나 객주에서 체관에 절는
걸음과 가슴마다에
둥지를 찾아 날아드는
새들의 지저귐마다에
너, 정녕
아련한 추억이 되고
정성 어린 현재가 되고
광영스런 미래가 되어
몸과 마음을 밝히는 찬란한 등불이 될진정!
이에 미력을 모두워 비를 세우고
삼가 비문을 새기다. 


비암날망〔마을〕
〔위치〕큰태봉과 작은태봉의 사이에 있는 날등이다. 


사러리(산이리, 산언리, 사내리(思內里))〔마을〕
〔위치〕동산고개 서쪽에 있던 마을이다.
〔유래〕한 선비가 이 마을에 자리를 잡고 마을사람들에게 생각은 신중하게 하고 말을 더듬는 것처럼 어눌하게 하라고 일렀다고 해서 처음에는 사눌(思訥)이라 하였다가 뒤에 사러리라 불렀다고 한다. 즉 살아간다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하기도 하며, 마을의 뒷산이 이리처럼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한편, 옛날에 마을의 뒷산에 이리가 많았던 마을이라 산이리라 부르다가 사러리로 바뀐 것이라고도 한다.
〔특이사항〕현재에는 수몰되어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사창이〔마을〕
〔위치〕골과 방축골 사이에 있는 동네이다. 


삼태봉〔산〕
〔위치〕비금마을 뒷산에 위치한 세 개의 봉우리이다.
〔유래〕산봉우리 셋이 수려한 모습으로 삼태성처럼 솟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새말〔산〕
〔위치〕사러리 윗편 큰태봉골과 불모골 사이에 있는 야산 이름이다.


서당골〔골〕
〔위치〕배골의 북동쪽에 있다.
〔유래〕옛날에 서당이 있었던 곳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소정이(소정(小鼎))〔마을〕
〔위치〕동산고개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유래〕소나무 정자가 있는 작은 마을이다. 또는 동네의 형국이 작은 솥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소정(小鼎)이라고도 했다. 


신절골〔마을〕
〔위치〕옛 안 밭들에 있는 마을이다.
〔유래〕1980년 대청댐 건설로 수몰되어 수몰민들이 이사하여 새로 생긴 마을이다.


신절골 낚시터〔못〕
〔위치〕신절골 앞 수몰 전 낚시를 하던 곳이다. 


안마뜰〔들〕
〔위치〕신절골 서쪽에 있는 들판이다. 


안밭뜰〔마을〕
〔특이사항〕수몰되기 전 주원장터에서 이사온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안산〔산〕
〔위치〕작은 태봉 앞에 있는 산이다. 


여수굴〔굴〕
〔위치〕태봉날 왼쪽 깊은 골짜기 안에 있는 커다란 굴이다. 


옻샘〔샘〕
〔위치〕큰태봉 아래 있는 샘이름이다. 


윗골〔골〕
〔위치〕백골산 북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은개〔마을〕
〔위치〕사러리의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유래〕은빛이 나는 들 가운데에 개울이 흐른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작은 태봉〔산〕
〔위치〕큰 태봉 왼쪽에 있는 두 번째 봉우리이다. 


장골〔골〕
〔위치〕비금 동남쪽에 200여년 된 향나무가 있는 곳이다.
〔특이사항〕옛날 사당패가 있던 자리라고 한다. 


장터(주안장터, 주원장터, 주봉향(周峯鄕), 주안향(周岸鄕))〔마을〕
〔위치〕비금 북서쪽에 있는 수몰된 옛장터이다.
〔유래〕옛날에 이 곳에 장이 섰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특이사항〕신하동에서 가장 큰 마을이었는데 현재에는 수몰되었다. 근처의 흙이 붉은색인 것이 특징이라 한다. 또한 동면사무소, 동면초등학교, 동면지서, 동면농협 및 창고터, 동면우체국터 등이 모두 이 장터 주변에 있었다. 


절골〔마을〕
〔위치〕신절골 북동쪽의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다.
〔유래〕이곳의 지형은 중이 배낭을 지고 가는 형국이라고 하는데 신라 때 어느 스님이 말하기를 「이곳은 불문(佛門)고을 터이니 절을 짓고 부처님을 모시면 마을이 융성할 것이다」고 하여 큰절이 들어섰는데 그 후 절은 없어졌지만, 동네가 생기면서 그 골짜기의 이름을 따서 절골이라 했다고 한다. 그러나 신절골은 비금에 새로 생겼다. 


절터〔터〕
〔위치〕백골산 북동쪽에 절이 있던 터이다. 


참나무메기〔골〕
〔위치〕태봉골 근처에 있다.
〔유래〕참나무가 많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으로 참나무 숯을 구었다고 한다. 


창골날망〔마루〕
〔위치〕작은 태봉 앞에 있는 작은 날망이다. 


채봉골〔골〕
〔위치〕비금 동북쪽산에 위치해 있다.
〔유래〕사람이 죽으면 채봉하던 곳(시체를 나무위에 올려 놓고 뼈만 남으면 추려다가 장사 지내는 곳)이다. 


청적골〔골〕
〔위치〕절골 옆에 있는 골짜기이다.
〔특이사항〕절터가 남아 있다,
큰 태봉〔산〕
〔위치〕비금 동쪽에 있는 제일 큰 봉우리이다. 


태봉골〔골〕
〔위치〕태봉산 서쪽과 비금마을 동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태봉산(胎峯山)〔산〕
〔위치〕묘동 동쪽에 있는 큰 산이다.
〔유래〕옛날에 왕의 태(胎)를 묻었던 곳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특이사항〕산수가 빼어나서 경치가 아주 아름답다. 


토끼봉들〔들〕
〔위치〕신상리에 있는 토끼봉의 동쪽에 위치한 들의 이름이다. 


포항〔못〕
〔위치〕신절골 앞 수몰지역으로 농사를 짓는데 쓰던 물둠벙이다.


 한식말〔마을〕
〔위치〕절골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역사인물>

김정 선생 묘소 사적비
신하동 입구의 길가에 있다.
김정 선생 묘소 입구에 있는데 여기에는 김정(金淨 1486∼1521) 선생을 모신 사당과 무덤이 있다. 중종 2년(1507) 형조판서 등을 지내면서 현량과(賢良科)를 신설하였다. 조광조와 더불어 전횡을 막고 지치(至治)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미신을 타파하고 향약을 전국적으로 시행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기묘사화로 제주에 유배되었다가 36세에 사사(賜死)되었다. 인종 1년(1632년)에 신원이 복직되고 영조 24년(1748)에 영의정으로 추증(追贈)되어 부조묘(국가유공자의 신위를 영원히 제사지내는 사당)를 명하였고 시호는 문간공(文簡公)이며 시와 그림에도 능하였고 무덤 동쪽에 부인의 정려가 있다.
김정 묘소 일원(金淨 墓所 一圓)
신하동 입구의 길가에 있다.
문화재자료 제 25호로 지정된 곳으로 신하동 입구의 길가 좌측에 있다. 이는 조선 중종 때 형조판서 겸 예문관제학을 지낸 충암 김정(1486∼1521) 선생과 관계된 유적이 자리한 곳으로 1978년 대청댐 수몰지역인 대덕군 동면 내탑리에서 이곳으로 묘소를 이장하였으며 건조물도 이전하였다. 이곳에는 인조 19년(1641)에 세워진 신도비와 충암선생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는 별묘, 재사인 산해당, 그의 부인의 정려각 등이 있는데 이 건축물들은 조선 후기의 건축기법으로 복원되었다.
백골산성(白骨山城)
대전직할시 동구 신하동 산13에 위치한 이 산성은 대전관내의 산성으로는 유일하게 1차 방어선을 형성하고 있는 금강너머에 위치하고 있는 백골산의 정상부(해발 340m)에 테뫼식으로 쌓은 석축산성이다.
이 산성은 서쪽으로는 백제측의 전략적 거점인 계족산성과 동쪽으로는 신라측의 유명한 환산성과의 사이에 위치하고 있어 전략적 요충지로 백골산이라는 명칭에서도 시사하듯이 이 산성을 사이에 두고 삼국시대에 백제군과 신라군간의 치열한 공방전이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성벽은 지형에 따라 축조되어 있는데 그 둘레는 약 400m 가량 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석축성벽이 가파른 지형에 축조된 관계로 거의 무너져 내린 상태였기 때문에 원상을 확인하기가 힘들다.
충암 김정 부인정려문(沖菴 金淨 婦人旌閭門)이 김정 묘소 아래에 있다.
이 정려문은 김정 선생 부인 은진송씨의 정려문으로 본래 순종 3년(1803) 건립했던 것을 1980년 3월 대청댐 건설로 이전하여 현재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