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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 내동(內洞)
    내동(內洞) 게시글에 대한 등록 이미지
출처 《大田地名誌》(大田直轄市史編纂委員會, 1994)
작성일 2005-04-19
조회 9038
첨부 1113892526.12_내동.jpg (9.7KB)
상세정보 〔위치〕서구의 남쪽에 위치한 법정동이다. 동쪽은 가장동, 서쪽은 월평동, 남쪽은 변동, 북쪽은 괴정동과 경계하고 있다.
〔연혁〕내동은 백제(百濟)때 노사지현(奴斯只縣)에 속했었다. 신라(新羅) 때는 비풍군(比豊郡)의 영현(領縣)인 유성현(儒城縣)에 속했으며 고려(高麗) 때는 공주부(公州府)에 속했었다. 조선시대 초기(朝鮮時代 初期)엔 공주군 천내면(公州郡 川內面)의 지역이었으며, 1895(고종 32)년 행정 구역 변경으로 회덕군 천내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 구역 개혁으로 가장리의 일부와 예정리를 병합하여 내동리(內洞里)라 하고 대전군 유천면(柳川面)에 편입하였다. 1963년 대전시 내동이자, 중구에 속하였다. 1988년 1윌 1일 대전시 서구에 편입되었으며, 1989년 1월 1일 대전직할시 서구 법정동으로 가장동에 편입되었다. 현재는 도시개발로 전형적인 주거지역이 되었다.
<지명>
갓골(변동(邊洞))〔마을〕
〔위치〕안골 갓쪽(邊方)에 위치한 마을이다.
〔유래〕산 바깔쪽에 자리해 있음으로 생긴 명칭이다.
내동초교 4거리(內洞初等學交 四街)〔거리〕
〔위치〕내동초등학교 서쪽에 있는 4거리로 내동로와 동서로가 교차되는 지점이다. 정림동 3거리에서 북쪽으로 이곳에 이르며, 계속 직진하면 내동 4거리와 탄방동 4거리에서 계룡로와 만나게 된다.
내동초등학교(內洞初等學校)〔학교〕
〔위치〕변동 4거리 서쪽(내동 13-1)에 있는 초등학교이다.
〔특이사항〕1979년 10월 8일에 개교하였다.
내동로(內洞路)〔거리〕
〔위치〕정림동 3거리에서 탄방동 4거리까지의 도로를 내동로라고 한다. 계백로에서 계룡로까지 내동초교 4거리와 내동 4거리를 거쳐서 직진할 수 있는 외곽 도로이다.
내동 4거리(內洞 四街)〔거리〕
〔위치〕내동로와 갈마로가 교차되는 4거리로 내동초교 4거리와 가장동 4거리, 탄방동 4거리, 갈마동 3거리로 직행할 수 있다.
내동종합시장(內洞綜合市場)〔시장〕
〔위치〕내동상가(내동 11-1)로 1985년에 개장한 종합시장이다.
내동중학교(內洞中學校)〔학교〕
〔위치〕변동 서우아파트 남쪽(변동 산10-52)에 있는 중학교이다.
〔특이사항〕1992년 4월 2일에 개교하였다.
내동파출소(內洞派出所)〔행정〕
〔위치〕한민쇼핑센타 맞은 편(내동 5)에 있는 파출소로, 1980년 11월 10일에 개소하였다.
서우시장〔시장〕
〔위치〕내동 167번지에 위치하는데, 1990년 9윌 30일에 개장한 시장이다.
안골(내동(內洞))〔마을〕
〔위치〕갓골 안쪽으로 위치한 마을이다.
〔유래〕산 안쪽에 자리잡은 마을이라서 생긴 이름이다.
〔풀이〕안골>내동(內洞)으로 고유어로 된 복합어 지명 이 한자어로 변한 것이다.
안골어린이공원〔공원〕
〔위치〕내동 제2어린이 공원(내동 161-7)이다.
〔유래〕갓골 안쪽에 위치한 마을에 있다하여 안골 어린이 공원이라 부르고 있다.
예정(藝亭)(재치정)〔마을〕
〔위치〕갓골(邊洞) 동쪽에 위치한 마을로, 재치정이라고도 부른다.
〔유래〕마을이 산등성이에 있으므로 재치정이라 부르다가 변하여 예정 또는 예정리(藝亭里)라 부른다.
〔풀이〕고유어 지명이 한자어 지명한테 밀려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예정 어린이공원〔공원〕
〔위치〕내동 제1어린이 공원(내동 16-1)이다.
〔유래〕예정리(藝亭里)에 있다하여 예정 어린이공원이라고 부른다.
<토속>

이여송(李如松)이 뜬터
내동 뒷산에 있는 가새바위 남쪽 고스락이 명당이라 한다. 임진왜란 때 이여송이 이 명당을 그냥 두면 뛰어난 장수가 난다 하여 이곳을 파고 숯불을 피워 떴다고 하는 데서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지금은 그 자리를 흙으로 메워 어떤 사람이 묘를 썼다고 한다.
<역사인물>

의사 박사진 정려지(義士 朴士振 旌閭址)
예정(藝亭) 마을에 임진왜란 때 의병(義兵) 박사진의 정문이 서 있던 터이다. 박사진은 선비로서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옥천(沃川)에서 의병을 일으킨 조헌(趙憲)의 진영에 투신하여 청주성(淸城) 전투에서 무공을 세웠고, 금산(錦山) 전투에서 의병 700명과 함께 금산 연곤평(延昆坪)에서 전사한 의병(義兵)이었다. 국가에서 정문을 세우고, 공훈을 충신정려기에 담았으나, 지금은 애석하게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1993년 사정동에 그 순의비를 세웠다.
현재는 도시 계획에 의해 없어졌고, 개인 집이 들어서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