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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시민이면 꼭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대전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가, 단재(丹齋) 신채호 선생이 있습니다.

불의에 타협하지 않았던 임시정부 발기인, 무력투쟁이 최선일 수밖에 없는 독립운동가, 주린 배를 움켜쥐며 만주벌판을 누비던 민족사학 대가….

단재를 대표하는 이 표현들만 봐도 그가 어떤 인생을 살았을지 눈에 선한데요.

그 모습을 널리 알리고자 서대전시민공원에 단재 신채호 선생 동상을 세웠습니다.

8일 서대전시민공원에서 열린 단재 신채호 선생 동상 제막식
[8일 서대전시민공원에서 열린 단재 신채호 선생 동상 제막식]


천재 소년이 자란 정생동

단재는 중구 어남동 도리미마을(당시 충남 대덕군 산내면 어남리)에서 1880년 12월 8일 태어났습니다.

보문산 가파른 자락이어서 지금도 주택이 많지 않은 이 동네, 당시는 드문드문 독립가옥 몇 채밖에 없던 외딴 골짜기 였는데요.

이곳에서 단재는 가난한 유년기를 보내다가 8살 때 부친이 사망하자 청원군 낭선으로 옮겨 할아버지(신성우)로부터 한학을 배웠는데, 깨우침이 남달라 신동이라 불렸습니다.

중구 어남동 단재 신채호 선생 생가지
[중구 어남동 단재 신채호 선생 생가지]


망국과 독립운동

단재가 성균관 박사가 되던 해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됩니다.


실천주의를 바탕으로 하던 단재는 성균관을 박차고 나와 즉시 항일 독립운동에 헌신하는데요.

그의 언론을 통한 대중계몽운동은 국권 침탈 즈음해 의열단 무력투쟁으로 더욱 강력해집니다.

그러면서도 단재가 깊이 생각한 것은 우리 민족이 역사의식을 통해 독립운동의 근본을 깨우쳐야 한다는 것인데요.

만주로 망명한 그는 배고픔 속에서도 만주벌판에 흩어져 나뒹구는 고구려 유물을 쓰다듬으며 상고시대 이래 올바른 역사정립에 온 힘을 쏟았습니다.

이 때 단재는 "집안현(고구려 수도 국내성이 있던 곳, 현재 길림성)을 한 번 봄이 김부식의 고구려사를 만 번 읽는 것보다 낫다"며 “영토를 잃은 민족은 재생할 수 있어도, 역사를 잃은 민족은 재생할 수 없다”는 유명한 말을 남기는데요.

그렇게 완성된 것이 우리나라 근대사학의 한 획을 그은 조선상고사입니다.


중구 어남동 단재 신채호 선생 생가지


기회주의자를 배격하다

3·1 만세운동이 전국을 휩쓴 1919년 신채호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발기회에 참여합니다.

하지만 임시정부 대통령에 이승만이 선출되자 신채호 선생은 분개하는데요.

당시 이승만이 미국에 우리나라의 위임통치를 청원하는 등 독립에 반하는 행위를 하는 것을 보고 그의 인물됨을 간파했기 때문입니다.

단재는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았는데 이승만은 없는 나라까지 파는구나“라며 임시의정원을 박차고 나왔는데요.

이후 대한독립청년단, 군사통일준비위원회 등 더욱 강력한 투쟁을 전개하다 1928년 체포돼 뤼순감옥에서 1936년 순국했습니다.

단재 신채호 동상 제막식

단재가 태어난지 139년 되던 지난 8일 서대전시민공원에 신채호 선생 동상이 제막식을 갖고 시민에 공개됐습니다.

8일 서대전시민공원에 열린 신채호 선생 동상 제막식
[8일 서대전시민공원에 열린 신채호 선생 동상 제막식]


신채호 선생 동상은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단재기념사업회와 학자, 시민단체 등으로 구성된 자문위원회가 얼굴, 어록, 조형 등에 대한 면밀한 고증을 거쳤는데요.

장소는 상징성·대표성·접근성 등을 고려해 서대전시민공원으로 최종 결정됐습니다.

이날 제막식에서 허태정 대전시장은 “민족 대표 독립운동가 단재 신채호 선생이 대전의 인물임을 시민에게 알리고, 단재의 정신을 시민과 공유하고 역사적 자긍심을 높이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8일 서대전시민공원에 열린 신채호 선생 동상 제막식에서 단재 어록을 살펴보는 허태정 대전시장
[8일 서대전시민공원에 열린 신채호 선생 동상 제막식에서 단재 어록을 읽는 허태정 대전시장]


자세한 내용은 대전시 문화유산과(042-270-4523)으로 문의하세요.